세계무대 진출한 공예가

생활용품에 자수 접목시켜

전통문화 오해 바로잡아야

누가 봐도 장래가 보장된 길을 걷고 있던 대학원생이었다.

국내 일류 약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중 돌연 전통자수 공예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매일같이 바늘과 명주실을 잡은 지 어느덧 10년. 운경(雲耕) 이경희 씨는 전통자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옛것을 알리는 전문 공예작가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공부를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어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때 만난 게 자수예요.

자수틀 앞에 앉아 다섯 시간씩 수를 놓다 보면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더라고요.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자수를 시작하게 됐어요.”

이경희 씨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부모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1년 가까이 앓아누울 정도였다.

이 씨의 스승인 무형문화재 제80호 김태자 씨마저 “젊은 사람이 왜 굳이 전통자수를 하려고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그럼에도 굳은 결심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누구보다 끈질기게 도전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전통자수 과정을 이수했는데, 이 씨와 같이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 중 여정을 마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전통자수 공예가 이경희 씨가 본인의 작품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사진=C영상미디어)
 

 

2년에 걸쳐 완성한 8폭 병풍은 그의 실력과 인내심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6폭 병풍을 만드는 사람은 많지만 8폭 병풍까지 제작하는 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8개 작품으로 구성된 병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날이 발전한

솜씨가 엿보인다.

특히 세밀한 표현이 필요한 수박 자수는 굉장히 어려운 편에 속하는데, 이것만 해도 세 번 정도

수를 뜯어내고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8폭 병풍은 이 씨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다.

그의 전통자수는 병풍이나 향낭처럼 흔히 ‘옛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와인 거치대부터 블루투스 스피커 겉면까지 조화가 이뤄지지 않을 법한 제품에도 입혀졌다.

일본 쇼핑몰에 입점한 제품도 있다.

이들은 충청남도 프로젝트를 통해 나온 결과물로 이 씨가 작품관을 바꾼 계기가 됐다.

“저는 스스로를 오로지 전통자수만 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는데 전통자수를 접목한 상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니, 가치관에 혼란이 왔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의 멘토링을 거치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어요.

국내에서 전통자수를 활성화시키고, 외국에 알리기 위해서는 전통자수가 더해진 상품을

만들어야겠구나 싶었던 거죠.

제품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을 때 그 모티브가 전통자수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이에요.”

그의 작품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공개됐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프랑스 전시에서 자수 작품은 현지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취재진들이 이 씨의 공방을 찾아 한국의 전통자수를 알리는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다.

지난 1월에는 스웨덴 박물관 초청으로 개인전도 열었다.

앞서 해외 전시는 단체전이었던 반면 그의 작품만을 위한 전시회로서 더 큰 의미를 가졌다.

‘과연 관람객이 찾아올까’ 했던 우려는 괜한 걱정이었다.

자수가 일상 곳곳에 활용되는 국가여서인지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해외 전시에 따른 막대한 비용은 매번 문제였다.

그래도 해외 전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우리 전통문화를 세계로 확산시키고 싶은 진심. 한국 전통문화의 맥을 잇겠다는 사람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역할을 해내고 싶다는 말이다.

그는 청와대 사랑채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두 차례 강의도 했다.

한 공간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관광객 특성을 감안해 간단하면서도 한국적인 선물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의였다.

자수를 입힌 작은 복주머니 안에 향을 넣어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호응을 얻으면서

당초 계획된 강의 기간을 늘렸다.

1) 이 씨가 8폭 병풍에 수놓은 수박의 모습. 2) 자수가 새겨진 거울의 뒷면.(사진=C영상미디어)
 

 

최근에는 주부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품에 자수를 접목시키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브로치나 소규모 액자, 열쇠고리 등이다.

전통자수만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곳곳에서 선보이면 전통자수 입지가 확대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그는 온화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안정감을 전통자수만의 매력으로 꼽았다.

충남 천안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것 또한 전통자수 확산 방안 중 하나다.

수도권과 달리 지방에서는 배우고 싶어도 그 기회가 현저히 적어 먼 곳까지 이동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이 반영됐다.

전통자수가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만 배울 수 있는 영역이 된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끊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한몫했다.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많은 사람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공방 이름은 이 씨의 호를 딴 ‘운경’이다. ‘구름 운’ 자와 ‘밭 갈 경’ 자를 합해 ‘구름밭을 간다’는

뜻이다.

최고 경지에 올라 한곳에 머물지 않는 구름처럼 세계 이곳저곳에 우리 전통을 알리고 싶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하려는 계획도 있다.

규모가 확장되면 경력단절여성, 장애인, 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씨는 전통자수만큼 전통문화를 정확히 전파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특히 ‘오방낭’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안타까워했다.

오방낭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오색 비단을 사용해 만든 전통주머니다.

우주와 인간을 이어주는 기운으로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인용되면서 오방낭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는 작품 전시 기회가 있을 때면 오방낭을 선보이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이 한번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떨쳐내는 게 쉽지 않아요.

오방낭이 잘못 활용되긴 했지만, 한국 전통 예술작품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잖아요.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바로잡아 알리는 것도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아닐까 해요.”

전통문화 오해 바로잡는 역할 필요해

정부 차원의 뒷받침이 더욱 탄탄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였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되더라도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전통문화

확산을 더디게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공예산업은 빠른 시간 안에 커다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산업이 아님에도 성과를

재촉하는 관계자의 태도에 상처를 입은 적이 많았다.

“스웨덴의 전시회를 가보니 그곳은 5년 정도 작품 활동을 기다려준다고 해요.

한 작가가 입지를 다지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거죠.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드문 경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원하는 기간 안에 결과물이 없으면 지원금을 환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니까요.

성과 위주 지원보다 꾸준한 관심이 더욱 필요한 부분입니다.”

혹자는 이 씨를 향해 “돈도 안 되는 일을 한다”며 한숨 섞인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행복하잖아요.” 

그는 자신과 같이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그만큼 정신력도 강해지거든요.

그리고 끈기가 필요해요. 저 역시 짧지 않은 시간을 거쳐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어요.

가끔 저를 보면서 ‘저 사람한테 몇 달만 배우면 나도 할 수 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멀리 바라보세요.”

기사입력: 2018/03/06 [19:39]  최종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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