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의 '수성동, 기념물 지정'

겸재가 그린 수성동 계곡이 전통적 명승지로서 보존가치가 크고, 문화사적으로도 가치 있다고 판단, 서울시의 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운영자 | 기사입력 2010/05/03 [23:15]

인왕산의 '수성동, 기념물 지정'

겸재가 그린 수성동 계곡이 전통적 명승지로서 보존가치가 크고, 문화사적으로도 가치 있다고 판단, 서울시의 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운영자 | 입력 : 2010/05/03 [23:15]
삶의 반세기를 인왕산에서 살며 인왕산 곳곳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던 겸재 정선(1676~1759), 역시 인왕산 아랫동네에 살면서 19세기의 신 지식인 중인(中人)들과 교류하며 위항문학(委巷文學)을 꽃피웠던 추사 김정희(1786~1856), 양반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뛰어난 능력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서리(書吏)로 근무했던 존재 박윤묵(1771~1849).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문장가인 이 세 사람이 각각 화폭과 시에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결같이 노래했던 그 곳, 인왕산 자락의 잊혀진 계곡 수성동(水聲洞)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 위항문학 : 조선 후기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기존의 한문학이 양반사회의 전유물이었다면, 위항문학은 중인, 평민층이 중심이 되어, 이를 계기로 문학이 사회저변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시는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고, 조선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수성동’그림에도 등장하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 이 전통적 명승지(名勝地)로서 보존가치가 크고, 또한 이 일대가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의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다고 판단하여, 동 계곡을 문화재위원 조사와 문화재위원회 심의(2010. 4. 8)를 거쳐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하였다.

※ 기념물 :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역사 유적지·고고 유적·전통적 경승지(경치나 경관이 뛰어난 곳)·식물 중에서 학술적·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함

한편, 동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돌다리는 그간 “기린교(麒麟橋)”로 소개되었으나, 정밀조사 결과 기린교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통돌로 만든 가장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으므로, 약 190m에 달하는 계곡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기로 하였다.

※ 문화재 지정 범위 : <인왕산 길> 아래 인왕산 계곡 상류부터 하류 복개도로 전까지 계곡(총길이 190m, 총폭 18m)과 돌다리(길이 3. 8m, 폭 90cm)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 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계곡’ 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 종로구 옥인동 옥인아파트 일대를 일컫는다.

그 옛날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흘렀는데, 이 물줄기가 기린교에서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옥같이 흐르던 “옥류동 계곡”은 복개되어 주택가로 변했지만, 수성동계곡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여전히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부터 수성동 계곡 이곳 저곳에는 저명한 인물들과 그에 얽힌 유적들이 널리 분포하였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옛 시와 그림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경관이 수려하여 노닐기에 적당하며,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

‘한경지략’이나 ‘동국여지비고’등 19세기 사료에 의하면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여 시내와 암석이 빼어나 여름 밤에 노닐기에 적당하며, 옛적에 비해당(안평대군 이용의 집)이 있던 터이고, 근처에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수성동은 당시에 뛰어난 경승지였으므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반정으로 목숨을 잃은 당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1418~1453)도 이곳에 집을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윤묵> 등 중인 출신 위항시인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저명한 ‘옥계시사(玉溪詩社)’가 결성되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던 곳

어느 장마 끝 여름날 벗들과 술병 하나만 차고 수성동에서 노닐던 박윤묵

지금부터 딱 200년 전인 1810년, 여름 장마가 계속되어 인왕산 계곡물이 크게 불어났을때, 규장각 서리 박윤묵은 비가 그치자, 마음맞는 벗 몇명과 술한병을 들고 수성동에 들어가, 시를 돌려 짓고, 수성동의 풍경을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수성동에 노닐던 박윤묵은 위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거니와 평민시인천수경(千壽慶), 왕태(王太),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과 어울려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 장혼의 이이엄(而已广) 등에 모여 함께 시회를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문집 ‘존재집’에 자세하게 글로 남겼다. 지금 인왕산 자락에 시회를 열던 중인들의 집은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의 풍류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이러한 시모임(詩社)은 당시 양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학이 중인층을 비롯한 사회저변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묘사한 비오는 날 수성동 폭포의 장중함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수성동에서 멀지않은 월성위궁(月城尉宮)에 살면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추사는 비오는 날 수성동의 모습을 ‘낮인데도 밤인 듯 느껴진다’고 하며 매우 장중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김정희는 19세기 초 중인들의 모임터인 천수경의 집 송석원(松石園)의 글씨를 써주기도 하고, 조수삼, 오경석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는 등, 위항 시인들과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문학으로 맺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도 수성동의 옛 풍경을 만날 수 있어....

수성동은 시인들의 글과 함께 간송미술관에 있는 겸재의 <수성동> 그림으로도 그 옛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는 암석이 수려하고, 계곡에는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있는데, 선비들은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고 있다.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 (壯洞)일대를 8폭의 진경으로 남겨 놓았는데(壯洞八景帖) <수성동> 도 그 중의 한 폭으로, 앞서 박윤묵이 묘사한 수성동의 모습이 이 그림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수성동 계곡>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 그림 속 풍경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첫 사례

수성동 계곡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저명한 회화속에 등장하는 풍경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첫 사례로, 향후 문화재 지정의 방향 및 범위가 다양하게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내사산(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중 하나인 인왕산의 경관을 회복하는 계기

서울시에서는 동 계곡의 문화재 지정과 함께, 그간 인왕산 조망과 경관을 저해하였던 인근의 옥인아파트를 철거하여 2011년까지 수성동 계곡 주변의 지형과 경관을 옛 모습 그대로 회복할 예정이다.

○ 겸재의 그림도 이곳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어.....

또한, 수성동 계곡에 겸재의 그림과 이곳을 무대로 쓰여진 시들도 함께 전시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도심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옛 모습이 유지된 수성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고 옛사람들의 풍류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출처   서울특별시청
기사작성   장애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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